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 것인가?
베드로전서 4장 1~10절 /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86장)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7월 첫 주이며, 맥추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상반기 동안 주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하반기도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부터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이 가장 싫어하는 비가 무엇입니까? 산성비, 황사비, 우박비 아니면 무슨 비라고 생각합니까? 그 답은 사이비입니다. 우리 교회는 절대로 사이비가 고이지 않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눈 깜작할 사이에 상반기가 지나갔습니다. 한해의 터닝 포인트에 서있는 우리들이 하반기의 남은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나옵니다(2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반기의 남의 때와 육체의 남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육체의 남은 때를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그치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1절).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2절).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믿을 때 죄를 그치고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2절). 신앙의 선순환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죄를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고 합니다(3절). 여기서 ‘족하도다’는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가 족한 줄 알고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때 다시 반복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간 때가 족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미련이 남아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이전에 했던 것을 족한 줄 알고 더 이상 미련 없이 주님만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세상의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고 합니다(4절). 세상 사람들이 방탕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이상히 여기는 것은 그들에게 방탕한 삶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은 후에 방탕하게 살지 않는다고 비방을 받는다면 새롭게 변화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탕과 방황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방탕하면 타락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방황하는 것은 방향을 찾기 위한 과정이 됩니다. 우리가 방탕하여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방황할 수 있지만 주님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주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고 합니다(5절). 성도들이 하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믿으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합니다(롬14:8).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소유가 되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되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난해 구절이 나오는데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6절).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는 예수님을 믿고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도 육체는 사망함으로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육체는 사망하여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7절). 여기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를 대부분 ‘깨어있으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또 다시 막연해집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 것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가 남은 때를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합니다(8절). 여기서 ‘허다한 죄’는 실수를 의미하고, ‘덮느니라’는 감싸준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서 축복을 받았고,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지적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한 ‘뜨겁게 사랑할지니’는 깊이 있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있게 사랑할 때 서로의 실수를 감싸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남자는 비워야 회복되고, 여자는 채워야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남성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비우는 것이고, 여성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자를 사랑하는 방법은 비워서 해소를 시키는 것이고,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은 채워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때를 깊이 있게 사랑하면서 서로의 실수를 감싸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10절).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를 맡은”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됩니다. 또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11절). 히말라야 산자락 밑에서 선교하던 한국 선교사 부부가 추운 저녁 날에 네팔인 전도를 위해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집에 도착했을 때 난로가 넘어져 불이 났고 피하지 못한 두 자녀에게까지 덮쳤습니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자녀의 주검 앞에서 선교사 부부는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네팔 선교사들은 이들 부부가 받은 상처를 생각해서 조기 귀국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 부부가 나타나서 “아직도 주님이 우리 자녀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다시 우리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지불하겠습니다. 차차 주님의 뜻을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행20:24). 여기에 남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부부는 히말라야 산자락에 두 자녀를 묻던 날에 네팔의 영혼들을 가슴에 품었다고 합니다. 저는 선교사 부부의 모습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라고 믿습니다(10절). 우리의 남은 때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붙잡고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우리가 육체의 남은 때를 살면서 죄를 그치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2,3,4절)
2.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5절)
3.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7절)
4.우리가 남은 때를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8,10절)
□ 말씀 적용하기 (서로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1.우리가 세상에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이 있나요?
2.우리가 잠시 방황했지만 주님께 방향을 찾은 경험은 무엇이 있나요?
3.우리가 가족들을 깊이 있게 사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4.우리가 선한 청지가 같이 봉사하기 위하여 붙잡아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요?
□ 기도하기
사랑의 주님! 우리가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며, 예수를 믿기 이전에 했던 것을 족한 줄 알고 더 이상 미련 없이 주만 따라가며, 우리가 방탕하여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방황할 수 있지만 주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게 하소서. 우리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육체는 사망함으로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생하며, 올바른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의 남은 때를 깊이 있게 사랑하면서 서로의 실수를 감싸주고, 우리의 남은 때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붙잡고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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