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우리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설교 본문 : 룻기 1장 6 - 14절
6.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0. 들어가는 글
3월 마지막 주일이며,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미국으로 15년 전에 이민을 떠난 신학교 동기 가정이 고국을 잠시 방문해서 최근에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개척교회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지 이민을 떠난 동기 가정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디서나 사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민을 떠난 가정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는 이상 자발적으로 이민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 땅에 흉년이 들자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떠났습니다(1절). 그 가정이 이민을 떠난 이유는 흉년을 피해서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이민 생활에 실패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가정의 사는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가정의 사는 목적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우리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유다 땅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살았습니다(1절). 그 가정이 살던 사사시대의 특징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합니다(삿21:25). 그러므로 그 가정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육신의 양식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따라간 그 가정은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가정을 모압 땅으로 데리고 갔던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3절). 그 때 나오미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을 깨닫고 두 아들을 데리고 믿음의 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아들을 모압 여자 오르바와 룻에게 장가를 보냅니다(4절). 그녀는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들과 가정을 이룬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5절). 그제야 나오미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닌 것을 깨닫고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6절).
나오미의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서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중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돌아오지 못할 때 더 고통이 심해진다는 것까지 전해줍니다. 그러나 그 가정이 모압으로 떠난 것을 무작정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전하는 목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그 가정이 모압으로 떠난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정들이 살아가는 목적을 바르게 세워서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들이 후손 갖는 것을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불가능하게 생각했습니다(13절). 그러나 그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은 가능한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며느리 룻이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습니다(2:3). 여기서 ‘우연히’는 그냥 우연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2:12).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이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서 나오미는 며느리의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라고 합니다(4:16). 그리고 룻이 낳은 오벳은 다윗의 조부가 되며(4:22),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은 예수님 족보에 올랐습니다(마5:5). 며느리 룻은 불행한 여인에서 가장 복이 있는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은 가능한 것으로 바꾸었습니까?
3. 나오미가 룻에게 전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오미가 믿음의 땅 유다로 돌아올 때 모압 여인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합니다(16절). 그리고 그녀가 며느리 룻을 전도하여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만났습니다(2:20). 이처럼 한 영혼을 전도하였을 때 사람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가능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 나오미의 성품이 전도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진심으로 친딸처럼 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내 딸들아”라고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11,12,13절). 나오미가 이방인의 며느리들을 친딸처럼 대하는 성품이 주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지금의 성도들이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성품이 따라오지 못해서 전도가 안 됩니다. 제가 목회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설교만큼 저의 성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성품입니다. 우리들이 나오미처럼 사랑의 성품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전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나오미는 그녀들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함께 가자는 어떤 강요도 안했고, 오히려 ‘돌아가라’고 했습니다(8,11,12절).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세 번째까지 돌아가라고 했을 때 울면서 떠났습니다(14절).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네 번째까지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했지만(15절), 시어머니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18절).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도록 자유를 주었을 때(8,9절), 첫째 며느리는 우상의 땅 고향으로 돌아갔고, 둘째 며느리는 믿음의 땅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결심이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한 자유를 통하여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굳은 결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나오미는 상대방의 처지를 더 아파했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의 고백으로 누구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13절).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내 아들이 죽었다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징계 받는다고 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누구를 탓하지 않고 겸손히 회개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한 나오미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의 고백으로 며느리들의 처지를 더 아파했습니다(13절). 저는 이 고백이 룻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믿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자신의 처지만을 아파하면서 며느리들을 원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녀가 자신보다도 며느리들의 처지를 더 아파했을 때 둘째 며느리 룻이 구원받고 자신도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으로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성도들이 다른 사람의 처지가 더 아프다는 공감을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아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통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통을 받아서 아픈 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아파해줌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자신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가정들이 살아가는 목적을 바르게 세우며, 사랑의 성품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며, 우리에게 허락한 자유를 통하여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굳은 결심을 하며, 성도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아파해줌으로 공감하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