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구의 생각대로 하는가?
설교 본문 : 열왕기하 5장 8 - 14절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0. 들어가는 글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주는 2월이 끝나고, 3월로 넘어가는 주간입니다. 우리나라도 탄핵의 문제가 해결되고 따듯한 봄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전쟁의 영웅으로 크고 존귀한 자였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1절). 그의 나병을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소녀가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가 고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3절). 나아만은 아람 왕의 허락을 받은 후에 많은 재물과 그의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가지고 떠났습니다(5,6절). 그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당시에 나병은 불치의 병이었기 때문에 아람 왕이 시비를 걸어서 전쟁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옷을 찢으면서 분노했습니다(7절). 이처럼 왕들 간의 오해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하였습니다(8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치유 받는지를 깨닫고 우리들도 주님께 치유 받기를 소망합니다.
1. 왜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하는가?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의 집에 찾아갔습니다(9절). 그러나 그는 엘리사의 얼굴도 못보고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엘리사는 왜 나아만을 만나지 않고 사환을 보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찾아왔기 때문입니다(9절). 그는 최대한 군대 장관으로 포장하여 나병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세상의 장군으로 포장한 그에게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10절). 그가 몸을 씻으려면 말에서 내려와 머리에 쓴 투구와 군복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강에 담글 때 군대 장관이 아니라 나병 환자라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세상에서 대단해 보이는 껍데기가 아니라 연약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몸 씻는 것을 순종의 문제로만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을 완전한 순종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이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껍데기를 벗고 얼마나 큰 죄인인줄을 알아야만 주님께 씻음 받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곱 번은 세상의 껍데기를 완전히 벗고 자신이 누군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도 본래의 모습보다도 세상에서 보기에 좋은 것으로 포장하여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따르면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지난주 금요기도회 때 성가대가 특송을 하는데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에 선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라는 가사가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 후로 제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라는 회개의 기도를 계속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껍데기를 벗고 선한 것이 하나 없는 죄인인줄을 알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소망합니다.
2. 왜 분노가 생기는가?
이스라엘 땅을 찾아왔던 나아만은 “분노하여 떠나려고” 했습니다(12절). 그가 분노한 이유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고 합니다(11절). 그가 가진 생각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있습니까?
첫째로 그의 생각은 종교 의식과 절차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고, 아픈 부위에 안수라도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의식과 절차가 없어서 “노하여 물러갔습니다”(12절). 우리도 나아만처럼 종교 의식과 절차를 따지면서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식과 절차를 따지다보면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어떤 종교의 형식과 절차보다도 말씀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어떤 형식과 절차는 없었지만 말씀의 능력으로 나아만의 병을 치유하려 했습니다(10절). 그러나 나아만은 종교의 형식과 절차에 갇혀서 말씀은 듣지 않고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종교 의식과 절차보다도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그의 생각은 인간적인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선지자일지라도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전쟁의 영웅인 자신을 맞이해 줄 것이라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있었습니다(11절). 그러나 그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대보다도 사람의 기대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에서 인간적인 기대감이 많을 때 상처받고 분노가 일어나서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한 것이 하나 없는 저에게 기대감을 갖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감을 가져서 은혜 받고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그의 생각은 자신의 방법대로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나아만이 원했던 것은 “그의 손을 그 부위 위해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하는 이방 종교의 방법입니다(11절). 그가 우상을 섬기는 아람의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나아만처럼 세상의 방법을 가져다가 주님께 그 방법대로 해달라고 합니다. 설사 우리가 가져온 생각과 방법대로 되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서 제가 생각했던 방법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선하게 인도하는 것을 보면서 회개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선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에게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문전박대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엘리사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자존심을 부렸습니다. 그는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비교했습니다(12절). 여기에 그가 군대장관으로 있는 아람의 군사력이 이스라엘의 군사력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가 우월하다고 자존심을 세울수록 하나님과 담을 쌓고 나병을 고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에게 자존심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남편인데, 목사인데 무시를 당한 느낌이 들 때입니다. 제가 아내보다 무언가 우월하다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깎아 내리는 말로 아픔을 줍니다. 결국 아내와 더 담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아만이 자존심이 상하여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 왜 종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을까요? 종들이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을 듣고 그는 이스라엘 땅에 찾아온 목적을 깨달았습니다(13절). 나아만이 선지자를 찾아온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을 만나서 나병을 치유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에” 갇혀 있었는데(11절),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순종하는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14절). 신앙생활에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상처받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장 큰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둘째는 겸손히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존심을 부리며 “분노”했는데(12절), 겸손히 “내려가는”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14절). 우리도 사사로운 것에 자존심 걸지 말고 겸손히 내려가는 가장 큰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겸손히 내려가면 하나님의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는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라고 우월했는데(11절),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로 위치를 바꾸는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15절).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것으로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또한 그가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14절). 그리고 다시 태어난 그는 “내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니다”라고 주인을 바꾸는 고백을 했습니다(15절). 우리도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바꾸는 가장 큰 일을 통하여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세상의 모든 껍데기를 벗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받게 하소서. 종교 의식과 절차보다도 말씀을 의지하며, 사람의 기대보다도 하나님의 기대가 더 크며, 내 생각과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응답받게 하소서.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자존심이 아니라 겸손히 내려가며,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가장 큰 일을 통하여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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