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2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돼지 떼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설교 본문 : 마가복음 5장 1 - 13절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0. 들어가는 글
1월 네 번째 주일입니다. 최근에 폭설과 한파가 지속되면서 겨울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인들이 그리스도인 답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최근의 겨울처럼 우리들도 그리스도인 답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을 마가(20절)가 마태(7절)와 누가(14절)보다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전혀 마가답지 않습니다. 마가의 기록은 항상 마태와 누가보다도 간결했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거라사인 사건을 마태와 누가보다도 더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마가가 어떤 믿음을 추구했는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우연한 만남인가?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 지방에 가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1,2절).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 것은 절대로 우연히 아닙니다. 우연히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지날 때 큰 광풍이 불어서 죽게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4:37). 제자들이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어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심으로 거라사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4:39). 이처럼 어렵게 바닷길을 건너와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는데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밤중에 그 위험한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고 건너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분문에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만 바르게 묵상할 수 있습니다.
2. 더러운 영과 하나님의 영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증상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증상을 통하여 더러운 영과 하나님의 영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첫째로 더러운 영은 죽음으로 두렵게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생명으로 소망을 줍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가 있었습니다(3절). 이처럼 더러운 영은 죽음으로 우리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좌절과 절망으로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더러운 영에 끌려 다니면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요11:25). 그리고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과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더러운 영에게 끌려가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아서 영생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더러운 영은 제어가 안 되지만 하나님의 영은 제어를 합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드렸습니다. 그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4절). 이처럼 더러운 영은 우리를 제어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중독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중독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습니다. 목회자로 살면서 저의 감정을 제어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려운 영적 싸움입니다. 저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수많은 영적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성령님께 기도하면 감정이 제어된다는 은혜도 체험했습니다. 우리들이 더러운 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정을 제어하여 감사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더러운 영은 우리의 몸을 해치지만 하나님의 영은 치유를 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합니다(5절). 여기서 더러운 영이 어떻게 우리의 몸을 해치게 만듭니까? 밤낮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는 사람은 자신도 해치고 다른 사람들도 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치유하여 몸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는 자신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아껴주며 존중하도록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더러운 영으로 서로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서로를 격려하며 존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돼지 떼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거라사인에 도착했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귀신의 영이 제일 먼저 알아보았습니다(8절). 그리고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9절). 그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군대(Legion)는 로마 군단의 병력으로 3,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은 “우리를 돼지에게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12절). 그 결과로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돼지 떼가 몰살”하였습니다(13절).
먼저 더러운 귀신이 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라사인 지방에 예수님의 진입을 가로막고 계속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10절). 그리고 돼지 떼가 몰살함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생겼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17절). 그들은 경제적인 손실로 인하여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거라사인 사람들은 예수님께 구원받는 것보다도 돈을 버는 경제가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눅16:13).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도 돈이면 최고라는 경제가 우상이 되어서 불법을 저질러도 면죄부를 주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잘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돈을 최고로 여기는 거라사인 사람들이 돼지 떼 이천마리가 몰살하여 막대한 손해를 당했음에도 “왜 주님께 손해배상 청구를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돼지를 먹을 수도 없고, 사육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라사인 사람들이 수천마리의 돼지 떼를 사육하면서 유대인들과 거래하여 이득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라사인 사람들이 유대인과 돼지 떼를 거래하는 것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른채 했다는 것은 엄청난 이권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뒤에서는 율법에서 금지한 돼지 떼를 거래하는 유대인들이 앞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의인처럼 행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돼지 떼 몰살 사건을 통하여 겉과 속이 다른 유대인들의 위선을 세상에 폭로한 것입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안으로는 돈을 더 사랑하는 위선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과 밖이 다른 위선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회 다니는 체면 때문에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는 위선덩어리로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돼지 이천마리의 경제적 손실보다도 상처받은 한 영혼을 더 사랑했습니다(13절). 그 한 영혼은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고 데가볼리에 예수님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20절). 그는 놀림 받는 삶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놀라게 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고 놀림 받습니다. 어떻게 해야 변화될 수 있습니까? 돈이 최고라는 경제적 우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상처 받은 영혼은 누구입니까? 자녀를 잃어버린 가족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여 가족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19절). 그러므로 우리들의 겉과 속이 다르다고 놀림 받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상처받은 영혼들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히 아니라 사랑이며, 더러운 영에게 끌려가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아서 영생에 이르며, 더러운 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정을 제어하며, 더러운 영으로 서로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서로를 아껴주며 존중하게 하소서. 우리들의 돈이 최고라는 경제적 우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며, 겉과 속이 다르다고 놀림 받는 신앙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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