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0장 46 - 52절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0. 들어가는 글
11월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현직 대통령의 역대 최저치 5% 지지율을 보면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을 가까이 하였을 때는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추락하였습니다(삼상28:7). 또한 우리나라 대통령의 모습이 안데르센 동화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보입니다. 최씨 모녀의 비선 실세가 대통령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만들었어도 눈먼 참모들은 아부만 잘해서 자리를 보존하다가 눈을 뜬 국민들의 지탄과 저항에 부닥쳤습니다. 부디 국민들 앞에서 진실이 규명되고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46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권력과 부귀만을 쫓다가 오히려 눈이 멀어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맹인 바디매오가 어떻게 눈을 떴는지 깨닫고 우리들도 눈을 뜨고 새롭게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1.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인생은 각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맹인 거지로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듣고 말하고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볼 수 없는 핸디캡도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들만을 보면서 좌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는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들었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러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47절). 우리들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할 때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서 주변에서 말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간절히 찾았을 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찬양가사가 떠올랐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부르짖으며 기도했는지 성대 결절이 와서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습니다. 항상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다보니 목이 상해서 찬양 부르기가 힘들었고, 설교하는 목소리까지도 거슬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분들이 목을 조심하라고 사랑의 충고를 해줄 때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을 믿는다고 했습니다(렘33:3). 흙 수저로 태어난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도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기도하는 은혜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할 수 없는 것들만 보면서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떤 믿음이 있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는 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50절). 주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51절).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너무 뻔해서 싱겁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대답을 듣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52절). 어찌보면 예수님과 바디매오가 만나서 나눈 대화는 치유의 절차를 밟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가 어떤 믿음이 있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갔습니다(50절). 바로 그가 겉옷을 내버린 것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화는 겉옷을 전당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출22:26). 그들에게 겉옷이란 낮에는 돗자리처럼 사용하며, 밤에는 추위를 피하는 이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겉옷은 생활필수품의 첫 번째였습니다.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린 것은 예수님께 올인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가 아니라 먼저 겉옷을 내버림으로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겉옷을 의지하는 삶에서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치유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겉옷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들도 세상에서 의지하는 겉옷들을 먼저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치유 받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시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52절).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은혜로 볼 수 있는 눈을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52절). 우리들도 바디매오처럼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교인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삶으로는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믿는 다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가?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의 행동을 보면은 그의 사정이 급할지라도 반복적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르면서 기다렸습니다(47,48절).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으로 나아갔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50절). 바디매오는 주님의 부르심보다도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서 모든 결정권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나아가야만 선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부르심도 없이 나아가기 때문에 선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디매오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부르심에 따라 나아감으로 선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항상 어려운 것은 예수님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서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포기할 것이 많을 때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음이라고도 합니다. 바디매오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겉옷을 포기하였습니다(50절).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도 부르심이 있을 때 고기 잡는 그물과 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막1:16-20).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보다 누리려는 마음이 더 많을 때입니다. 오지에 선교사로 떠날지라도 누리려는 마음이 더 크다면 부르심이 아닙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명성이든 이 땅에서 보상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한다면 부르심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부르심을 받았지만 변질되는 빙점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누리는 것이 더 많아지는 시점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포기하고 따랐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권력을 누리려고 했을 때 배반하고, 부인하고, 도망치면서 추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부르심을 받았지만 변질되어서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도 포기하는 것보다도 누리는 것이 더 많아질 때부터입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수고하는 것보다도 누리려는 마음이 더 커지면 사유화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누리는 것보다도 포기하는 것이 더 많다면 얼마든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누리는 것보다도 주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많아서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을 지키는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들만 보면서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며, 세상에서 의지하는 겉옷들을 먼저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여 구원받게 하소서. 우리들이 참된 은혜를 받아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선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들이 누리는 것보다도 주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많아서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부르심을 지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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