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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 갈라디아서 2장 1-10절/ 2016년 7월 3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6-07-31 추천 5 댓글 0 조회 1512



201673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설교 본문 : 갈라디아서 21-10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0. 들어가는 글

7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불볕더위가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볕더위만큼 미국의 대선 경쟁이 치열합니다. 공화당의 아메리카니즘과 민주당의 글로벌리즘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니즘은 고립주의를 추구하며, 글로벌리즘은 개입주의를 추구합니다. 미국이 어느 주의로 가느냐?”에 모든 나라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을 보면서 강대국이 기침만 해도 약소국은 몸살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는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우리나라 미래가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유력한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이유는?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에 유대주의 교사들이 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4).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1장에서 다른 복음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1:7-9). 그리고 2장에서 바울이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력한 자들을 만나서 겪은 사건을 전합니다(1,2). 당시에 바울은 1차 선교를 끝마칠 무렵이었지만 사도권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력한자들을 사사로이 했습니다(2). 그가 유력한 자들에게 쫄지 않고 개인적으로 당당히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사사로이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성령의 보내심으로 선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했다고 합니다(2). 그의 이방인 선교는 인간적인 동기가 아니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시작할 때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13:4). 그러므로 그는 유력한 자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의식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했다고 합니다(고전9:26). 바울의 달음질은 오직 예수님께로만 향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핍박을 받거나 인정받지 못한 것 때문에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방향이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께로만 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방문했습니다(1). 그런데 거짓 형제들이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3). 그렇다고 그가 할례를 받지 말라는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고 합니다(16:3). 오늘 본문의 디도와 사도행전 16장의 디모데가 할례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준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기준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문제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본질과 비본질의 선을 그었습니다. 바울에게 할례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할례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의 본질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채 비본질에 목숨 걸고 다투는 신앙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오직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믿음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사람이 정한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람이 정한 것을 따르면 그 사람의 종이 됩니다(4). 바울은 사람의 종에서 자유하여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뜻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입니다(1:8).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하십니다. 디모데의 사역에는 할례가 필요했고, 디도의 사역에는 할례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기질이 달랐습니다. 디모데는 마음이 여려서 유대인들이 할례 문제로 공격하면 견디기 힘들지만, 디도는 담대해서 할례 문제로 공격해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교회를 평안하게 유지하는 은사가 있었고, 디도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분쟁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해결하였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기질과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바울은 유력한자들을 만날 때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6). 그러므로 그는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을 비교했습니다(삼상16:7).

 

첫째로 우리가 맡은 사역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의 경력이나 위치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맡긴 사역이 있듯이 바울에게도 맡긴 사역이 있었습니다(7). 지금도 어떤 경력과 위치의 외모가 아니라 어떤 사역을 맡았느냐가 중심을 보는 믿음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합니다(8). 그러므로 신앙의 겉모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했다고 간증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했느냐가 중심을 보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했는지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은혜 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력한자들의 외모가 기둥 같이 여길 만큼 대단한 사도들이었습니다(9).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듯이 바울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기둥처럼 대단한 사람이냐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중심을 보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우월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서로 사역이 달라도 존중해주면서 친교의 악수를 하게 됩니다(9).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친교의 악수가 없으면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 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수록 다른 사람에게 친교의 악수를 내밀 때 자신이 맡은 사역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 의식하며,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달음질이 사람들 때문에 헛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들이 비본질도 다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본질에 충실하게 하시며, 사람에게서 자유하여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의 분량만큼 잘 감당하게 하소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역을 맡겼으며, 어떻게 역사하시며, 어떻게 은혜 주신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친교의 악수를 내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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