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사랑?
설교 본문 : 이사야 49장 14-18절
14.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5월 둘째주일이며,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들이 부모를 공경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유명한 기업들이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돈을 벌고자합니다. 유명한 대학 교수는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보고서를 돈만 주면 조작해서라도 제공해줍니다. 유명한 로펌은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을 돈을 많이 주면 황사 때문이라고 거짓으로 변호해줍니다. 여기서의 공통점은 모두들 세상에서 유명한데 돈을 좋아해서 양심을 팔았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민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한명이라도 부모의 마음이 있었다면 자신의 자녀가 죽을 줄 모르는 일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부모의 마음으로 비유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부모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잊지 않으시는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며 잊으셨다고 불평합니다(14절). 그들은 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왔습니까? 그들이 포로로 끌려온 이유는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합니다(사48:4). 그들의 고집 센 마음과 교만한 목과 뻔뻔한 이마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평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모의 심정으로 사랑을 전했습니다(15절).
왜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으로 비유합니까? 첫째는 잊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라고 합니다(15절). 엄마가 젖 먹는 자식을 머리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젖 먹인 자식이 잘못되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부모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은 자식을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이 젖 먹이는 여인보다 사랑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15절). 젖 먹이는 여인은 자식을 잊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15절). 부모는 자식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품안에 있는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선악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사랑은 부모 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조건이나 선악을 초월하여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의 긍휼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손바닥에 새기시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잊지 않고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합니다(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역된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로 16절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며 잊었다는 불평에 대하여 “보라 내가 너희를 내 손바닥에 새겼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부모의 사랑도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예전에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할 때 보통 손바닥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도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적은 줄로 생각하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묵상할 때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손바닥에 새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랑에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성격과 처지와 부족함 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에 새기시며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신 사랑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모든 사랑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에 갈증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손바닥에 새기시는 사랑으로 우리들의 모든 갈증이 해결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코리 텐 붐이 나치수용소에 오랫동안 갇혀 지내면서 견딜 수 있었던 고백을 듣고 너무 공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만일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보면 물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현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변화되고 성숙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여 낙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손바닥에 새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성벽이 되어주시는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아니하는 또 하나의 사랑은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16절).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며 보호해 준다는 사랑입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성벽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존재하는 성벽이 우리를 가두며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지켜주며 보호해 주는 성벽이 되고 있습니까?
어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형수들의 사형이 집행되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들을 들으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로 실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이 죽음의 성벽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형 집행만 기다리던 그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사형장에서 자신이 매달려야 할 밧줄에 예수님이 목을 묶어서 하늘로 달려 올라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후 무릎을 꿇고 독방에서 사흘 밤낮을 엉엉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김진태씨는 어머니에게 너무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순간 이성을 잃고 살해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짊어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되어 주위의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재소자들에게 전도하여 십년 만에 예수님을 영접한 수가 육백 명이 넘었습니다. 이런 교도소 안에서의 선행과 주위 사람들의 탄원에 힘입어서 사형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고, 담장 안의 전도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를 사형수로 가두며 억압했던 감옥의 성벽이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자신의 인생을 구원한 성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억압하는 고통의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자고하지 않도록 겸손히 낮추는 감사의 성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부모의 간섭도 자식을 가둔다고 불평했을 수 있으나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자식을 잘되라고 했던 감사로 변활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앞에도 각자의 성벽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자신을 가두며 억압하는 성벽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지켜주며 보호해주는 사랑의 성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성벽이 감사의 성벽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손바닥에 무엇을 새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손바닥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새기시고 있습니다(사43:4). 이처럼 주님은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눈에도 우리들이 태어날 때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새기시는 사랑을 통하여 고통의 성벽이 감사의 성벽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조건을 초월하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손바닥에 새기시는 사랑으로 우리들의 모든 갈증이 해결되게 하소서. 또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새기시는 사랑을 통하여 고통의 성벽이 감사의 성벽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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