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말씀및찬양 >
  • 주일예배
나귀 새끼가 주님께 쓰임 받은 이유는?/ 누가복음 19장 28 - 40절/ 2016년 3월 20일 종려 주일
황승재 2016-03-22 추천 4 댓글 0 조회 949



2016320일 종려 주일

설교 제목 : 나귀 새끼가 주님께 쓰임 받은 이유는?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928 - 40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3월 셋째주일이며, 종려 주일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고난의 여정을 지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난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에 맞추어서 당시에 의원이었던 누가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고 합니다(28).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까? 주님은 은 열 므나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고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27). 오늘 본문을 앞 절과 연결하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자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왕이 되셔서 원수들을 심판해야 하는데, 오히려 예루살렘 입성하여 십자가에 죽으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늘의 왕과 세상의 왕이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의 권세와 힘을 이용하여 원수들을 심판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와 힘을 내려놓고 죽으심으로 원수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은 서로 대립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칙은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져줌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법칙인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셔서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 승리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늘의 법칙을 따라서 내 자아를 죽임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합니다(30). 여기서 드는 궁금증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만하면 나귀 새끼를 풀어오는 것이 가능할까?” 입니다(31). 어찌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 새끼를 도적질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가져올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서 애굽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까지 죽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는 율법이 생겼습니다(27:26).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가져오는 나귀새끼도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으로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쓰시기 전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세상에 매여 있는 것에서 풀어져야 합니다(33). 나귀 새끼가 묶인 것에서 풀어질 때 주님을 태우도록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예배와 헌신도 세상에 묶여 있으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매여 있는 것에서 풀어질 때 주님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왜 주님은 나귀의 첫 새끼를 타셨습니까? 물론 스가랴의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에 있습니다(9:9).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겸손하시고, 말씀을 성취하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장은 설명되지만 나귀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가 주님께 쓰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는 아무런 경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험을 의지할 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귀 새끼처럼 모든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귀 새끼는 처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처음 가는 길은 인도해줄 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익숙한 길이 아니라 항상 처음 가는 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귀 새끼는 주님을 처음으로 태웠습니다. 나귀는 처음 태운 주인의 방식대로 길들여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는 처음 주인으로 태운 주님의 방식대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길들여질수록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태우고 주님의 방식대로 길들여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무리들의 찬양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하였습니다(38). 사실 예수님과 무리들은 동상이몽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목적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믿었기 때문니다(36). 여기서 자기들이 보는 대로 믿으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의 동상이몽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다음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합니다(41,42). 여기서 무리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보면서 자신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리들은 평화의 의미를 모르면서 외쳤고, 지금 그들의 눈에 숨겨졌는데 자기들이 본 바대로 믿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정말 무리들이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동상이몽에 취해있는 무리들에게 반감을 가셨던 바리새인들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합니다(39). 이들도 주님을 따르기 보다는 판단하며 비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제 풀어야 할 숙제가 생겼습니다. 동상이몽에 빠져있는 무리들과 책망하라고 비난하는 바리새인 모두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고 하시면서 영적 소경된 무리들의 찬양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영적 소경의 무리들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보지 않고 중심을 보았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하는 것이 동상이몽의 고백이었지만 존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8).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하면서 찬양받을 자격이 없다는 무시를 하였습니다(39).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잘못하는 것보다도 중심에 존중하는 마음이 있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몰라서 실수할지라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내 자아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자아를 죽임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존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예수님처럼 하늘의 법칙을 따라서 내가 먼저 죽음으로 승리하게 하시며, 세상에 매여 있는 것에서 풀어져서 주님을 위하여 사용되게 하소서. 나귀 새끼처럼 모든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며, 항상 처음 가는 길이 되어서 주님의 인도를 받게 하시며, 예수님을 태우고 주님의 방식대로 길들여질 수 있게 하소서. 우리들이 자신의 자아를 죽임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존중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주님이 부활 후에 주신 은혜는?/ 요한복음 20장 19-23절/ 2016년 3월 27일 부활 주일 설교 황승재 2016.03.27 3 1025
다음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는가? / 마태복음 14장 22-33절 / 2016년 3월 13일 주일 설교 황승재 2016.03.13 3 1119

415809 경기 김포시 승가로 87-51 TEL : 031-985-4941 지도보기

Copyright © 김포한신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52
  • Total224,665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