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는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4장 22-33절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0. 들어가는 글
3월 둘째주일이며, 교회 절기상으로는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저는 청년시절에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베드로처럼 한번만이라도 물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물을 모아둔 저주지에 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겠다고 발로 물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신발과 바지만 젖어 집으로 오면서 예수님이 물위로 오라고 말씀해 주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스스로 위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따라 할 수 없어서 그런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것을 묵상하면서 분명히 기적은 맞지만 그 기적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물위를 걷는 사건에서 기적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사역 후에 무엇이 필요한가?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21절). 오병이어 기적으로 배가 부른 무리들은 주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요6:15). 또한 제자들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자리씩 자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은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들은 보냈습니다(22절). 그리고 주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서 혼자 계셨습니다(23절).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흔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떠나보냈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제자들처럼 사람들의 분위기에 흔들렸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따지면 찬반으로 갈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한마음으로 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사람들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한 마음으로 갈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사역을 마친 후에 재충전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사역 후에는 혼자 기도하였습니다(23절).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끝난 후에는 기도로 마무리 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면 기도를 열심히 해서 큰 행사를 치룬 후에 지치고 시험에 든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유를 찾으면 사역을 마친 후에 기도하면서 재충전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마친 후에는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재충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왜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셨는가?
오늘 본문의 풍랑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셨습니까?(25절).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것에 어떤 뜻이 있을까요? 혹자는 물위를 걷는 기적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를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모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위를 걷는 주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위기에 빠진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머리로 계산하는 것보다도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행동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위를 걷는 것은 어떤 기적의 효과보다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지난주 바둑대결에서 인공 지능의 기계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을 이겼습니다. 이제는 인공 지능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인공 지능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감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물위를 걷는 것도 감정이 없는 하이테크의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으로 찾아오시는 하이터치의 마음입니다. 앞으로 아무리 발전한 하이테크의 시대가 오더라도 우리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 싶은 하이터치가 더 필요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물위를 걸어오는 주님을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무서워합니다(26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고 합니다(27절). 여기서 ‘즉시’는 예수님이 무서워하는 자녀에게 부모가 먼저 안심부터 시키는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물위를 걷는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대단한 능력의 하이테크보다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하이터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죄악의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들이 세상의 죄악의 바다에서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 “어떻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합니다(28절). 여기서 ‘만일’은 의심의 마음으로 부탁한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유령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의 질문에도 “오라”고 하였고, 그는 그 말씀을 듣고 물위를 걸었습니다(29절). 어떻게 의심했던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까?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될수록 부모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마18:3). 베드로가 어른처럼 계산했다면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믿고 걸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비유로 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도로 건너서 엄마가 부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도로가 위험하다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오직 엄마의 품에 안기기 위해 걸어갑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부모와 같은 주님의 품에 안기기 위에서 그분만 바라보며 물위를 걸었습니다(29절). 우리도 오직 주님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그분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까? 그 이유는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30절). 그가 바람을 보는 순간 어린 아이에서 다시 생각이 많은 어른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보다도 바람이 더 무섭다는 계산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베드로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을 때는 기뻤는데 생각이 많은 어른이 되어서 주변의 바람들을 바라보면서 근심과 염려의 바다에 빠지고 있습니다. 저도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힘들게 하는 주변의 바람 때문에 염려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바람이 불어서 근심의 바다에 빠져있습니까? 자녀와 건강과 물질과 같은 세상의 바람이 불어서 우리들이 염려의 바다에 빠져서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염려의 바다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30절). 그러면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31절). 여기서도 27절처럼 ‘즉시’가 다시 나옵니다. 베드로는 의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났습니다(28,31절).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보여주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의심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즉시’ 보여주는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27,31절).
그러나 우리들이 의심과 염려의 바다에서 건짐 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를 주님이 붙잡아 주셨지만 아직 풍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근심과 염려의 바다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풍랑이 잠잠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를 때 그쳤습니다(32절). 그러므로 예수님이 붙잡아 주시는 믿음에서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고 함께 하는 믿음이 되어야만 주변의 모든 풍랑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사람들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사역을 마친 후에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재충전을 받게 하소서. 세상의 죄악의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는 우리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이 붙잡아 주심으로 의심과 염려의 바다에서 건짐 받은 후에,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고 함께 함으로 모든 풍랑을 그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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