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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누가 복음 10장 30-37절/ 2016년 2월 28일 주일 설교
황승재 2016-03-23 추천 4 댓글 0 조회 960



20162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설교 본문 : 누가 복음 1030-37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2월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북이 무력으로 대치된 상황에서 평화의 봄이 찾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주 은성 수도원에서 묵상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번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강도를 만난 이웃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나는 누구일까?”라는 고민을 다시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도님들도 본문의 인물 중에서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리고 만약 잘못 알았다면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콤플렉스란?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30). 여기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린 후에 강도와 같은 사탄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으로 내려가서 오히려 사탄과 영적 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주도 포천에 있는 은성 수도원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김포로 내려오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영적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비극적인 결말은 아닙니다.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피하여 지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31,32).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내서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어 주고 돌보아주었습니다(33,34). 그래서 저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의 손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 비전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서 선교와 구제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고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내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인정받고 싶은 메시야 콤플렉스가 심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를 돌아보니 내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로 인하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처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채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강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도를 만나 상처받은 사람인 동시에 강도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처럼 피해자가 나중에는 가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동시에 동생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목회를 하면서는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상처를 알고 받아들일 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어디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우리들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을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34). 그리고 주막에 머물면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충분히 치유 받도록 하였습니다(35). 여기서의 주막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받는 상처들이 아물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하다 보니 딱지가 뜯어져서 자신도 아프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교회들이 상처 받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치유 받을 수 있는 주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 은성 수도원에서 일주일동안 머문 것이 주막과 같은 교회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 상처를 돌아보면서 치유 받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묵상할 때 주막집 주인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막집 주인은 단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입니다(35). 그의 의로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 위치를 모르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설친 것들이 부끄러워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주막집 주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상처 난 사람을 주막과 같은 교회에 맡길 때 그들이 머물며 치유 받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자신이 먼저 치유 받고 세상의 상처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을 때 치유 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받아 찾아온 사람들에게 상처를 더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상처 받아서 흘리는 사람들의 피들이 더 많은 곳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라고 보내신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34). 여기서 기름은 성령이고 포도주는 보혈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부음과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막집 주인 같은 사역자는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을 붓고 십자가 보혈로 치유한 것이 낫도록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이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예수님 노릇을 하기 때문에 교회가 상처가 심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막집 주인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지 마시고 오직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성령의 기름과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 받고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이제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되시고, 주막집 주인은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사역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범한 평신도는 무엇이 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직 소개하지 않는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 만난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옮긴 나귀입니다(34). 본문의 나귀는 묵묵히 자신의 주인을 태우고 왔습니다. 또한 주인이 상처 만난 사람을 태웠을 때도 주막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귀는 다시 주인을 태우고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귀라면 주인 되신 예수님을 태우듯이 동일한 마음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태우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듯이 동일하게 상처 받은 사람을 태워주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궁금증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36). 그리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37). 여기서 저는 속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가 예수님처럼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서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무언가 되려고 하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집착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하려고 하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도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려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힘쓸 때 예수님을 본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되려고 하면 나귀나 주막집 주인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려고 하면 나귀의 역할도, 주막집 주인의 역할도, 심지어는 강도를 만나서 주님께 상처를 치유 받는 역할도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무언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려는 믿음이 되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상처받은 우리들이 주막과 같은 교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예수님께 성령의 기름과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를 받아서 가해자가 되지 않게 하시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예수님의 부탁으로 알고 주막집 주인처럼 돌보게 하시며, 주목받지 못한 나귀처럼 주님을 태우듯이 동일하게 상처받은 사람을 태워주는 마음으로 사랑의 섬김이 되게 하시며, 무언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려는 믿음이 되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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