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9일 주일설교
설교 제목 : 고난의 종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설교 본문 : 이사야 53장 1장 1 - 9절
1.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0. 들어가는 글
4월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 절기상으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막11:9). 그러나 그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막15:14). 메시야를 향한 그들의 소리가 며칠 만에 달라진 이유는 고난당하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당하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는 고난당하신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고난의 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만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합니다(2절). 여기서 예수님의 외모가 볼품이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고통스러워서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모습만을 보았을 때는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당하신 예수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신 주님의 뜻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 근거로 이사야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고 합니다(1절).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는 것으로 상처받고 실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구할 때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어느 것이 귀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이 고난 받은 것을 멸시하고 배척한 이유는 얼마나 귀한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을 우선순위로 세우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구원하심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것이 귀한지를 알아야만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귀한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가장 귀한 줄을 알아야만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가장 귀한 줄을 알고 삶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생각대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4절). 여기서 메시야의 고난 받으심을 우리의 생각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해는 다른 사람의 입장보다도 자신의 입장이 앞설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붙잡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평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고난의 종이 주신 은혜는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의 종이 십자가에서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합니다(5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신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 용서받은 후에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은 용서 없이 먼저 회복을 원하기 때문에 평화와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여 용서받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3. 고난의 종을 양으로 비유한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합니다(6절). 여기서 우리들을 양의 부정적인 성품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자기 고집대로 하는 못된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합니다(7절). 여기서는 예수님을 양의 긍정적인 성품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순종을 잘하는 좋은 짐승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양들은 못된 짐승과 좋은 짐승 중에서 어느 것입니까? 양은 두 개의 성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양들의 성품이 다를 수가 있습니까? 양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못된 짐승이 되는 경우는 선한 목자의 인도함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가 인도할 때는 도수장에 끌려가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이 됩니다. 우리도 선한 목자의 인도하심이 없을 때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잠잠히 순종하는 양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양들이 입을 열지 않고 잠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7절) 첫째는 선한 목자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은 죽으러 갑니다. 그러나 두려움도 없이 잠잠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한 목자가 도수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수장으로 인도하는 것도 선한 목자를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도 형통의 길뿐만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선한 목자를 신뢰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함입니다. 양들이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께 부르짖는 기도도 하고, 잠잠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잠잠히 침묵하는 것은 묵언수행처럼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자신의 말만 많이 하는 사람보다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도 우리의 간구도 많이 해야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잠잠히 듣고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4. 고난의 종이 죽은 후에는?
이사야는 고난의 종이 죽은 후의 모습을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고 합니다(9절). 먼저는 고난의 종은 죄가 없었는데 악인들과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11절). 이것이 고난의 종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또한 이사야는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예언합니다. 실제로 부자였던 아리마대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장사함으로 성취되었습니다(마27:57,58). 어떤 의미입니까? 부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러줄 수 있어도 살려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되어 부활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가장 귀한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우리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예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여 용서받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수장으로 인도하는 것도 선한 목자를 신뢰하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들이 잠잠히 입을 열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되어 부활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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